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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즐기자/책 이야기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by AlchemistNZ 2015. 10. 21.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박노해 시인의 시집을 마주했다.

박노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새 시집의 제목을 듣는 순간,

두번 생각할 여지도 없이 갖고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만드는 힘은

박노해라는 시인이 살아가는 범상치 않은 삶에 대한 경의이고 그가 시적 언어로 녹아낸 현실은 어떨지에 대한 호기심일 것이다.

 

너무도 많은 값싼 사랑과 정의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진정한 삶이 무언지를 아직도 찾아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이 선택한 단어 하나하나가 마음 깊은 곳에 울림을 주고 있다.

 

시 한편한편

그저 쓰인 것이 없고 어느것 한편 쉽게 읽고 지나갈 수가 없는 이 시집은 그래서 더 애틋하고 소중하고 가슴 아리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시 한편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빡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